Trace, 1997
 
퇴적하는 시간
김승곤, 1997
 

인간은 더욱 빠르고, 더욱 작고, 더욱 먼 곳에 있는 것들을 가시영역에 넣고자 노력해 왔다. 시선은 더욱 많은 것을 요구했고, 사진은 그 탐욕스러운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는 너무 빠르게 시간과 거리를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획득한 세계에 대한 지식보다 ‘시간’에 대한 정보의 양은 터무니 없이 적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카메라의 메커니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개선되었지만, 박홍천에게는 그런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여느 사진가들이 충실한 색의 재현을 위해서 필름과 광선을 선택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감광유제가 갖고 있는 자율적인 색채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필름과 노출을 결정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광선과, 광선이 쌓이는 과정으로서의 시간과, 특별한 시간이 만들어내는 색채다. 마치 초기의 사진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카메라의 렌즈를 열어놓고 유제가 광선에 충분히 젖어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의 사진은 사진 화상이 광선과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하는 당연하고 단순한 원리를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은 사진의 원점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과묵한 사진가다. 시간이 쌓여가는 것을 느끼며 카메라 옆에서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기다리는 시간 동안, 광선은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현실적인 거리일 것임에 틀림없다.

장시간 노출에 의한 그의 핀홀 카메라적인 방법은 일관되어 있다. 바다 풍경을 찍고 있으나,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 풍경 속에는 인공물이 포함되어 있다. 사진의 테마나 관심의 축은 그대로지만, 이전의 사진에 정서가 배제되어 있던 것과는 달리, 최근의 ‘벤치’ 연작에서는 서정성이 짙게 깔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또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인공물-벤치가 화면에 농설스럽게 돌출되지 않고 풍경 속에 동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바다를 향해 놓여진 벤치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하늘, 물리적 심리적인 공간의 구성에서도 변화를 볼 수 있다.

사진의 기법 그 자체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다. 느린 스피드의 필름과 광량을 억제하는 필터, 장시간 노출, 그리고 다소의 끈기-그것이 전부다. 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광선은 사진 유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충전시킨다. 시간은 아주 느린 속도로 풍경 속에 납처럼 녹아 든다. 그것은 시간을 압축시키고 그 형질을 확장시키는 일이다. 즉, 그는 시간을 물질화시켜서 그 시간에 물리적인 중량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단지 시간을 변화시켰을 때 얻어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 나타나 있다.

퇴적되는 시간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화면에는 불필요한 잡음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순수한 요소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 보는 사람의 눈길은 현실을 뛰어 넘어 더욱 멀고 깊은 장소로 유도된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이 하나로 녹아 든 심연. 그의 사진에서는 시간은 앞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향해 퇴행한다. 그는 정확하지도 않은 기억의 광맥을 찾아 시간의 동굴을 헤맨다. 사진은 그 외롭고 긴 탐험의 기록이고, 기시감을 비추어내는 스크린이다.

 

색채는 그의 작품에서 시간성 못지 않은 중요한 펙터로서 기능하고 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장시간 노출에 의한 교호의 효과를 구사해서 특수한 색채를 획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사진의 물질적인 특성에 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제 속에 갇힌 입자들이 시간의 중압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독특한 색조다. 그의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빛 바랜 것 같은, 또는 시간에 의해서 부식된 것 같은 병적인 색채다. 현실과 비현실의 애매한 경계에 놓여 있는 색채, 물질과 감정 사이의 색채다. 그 색채는 죽음을 환기시킨다. 죽음은 금기의 영역이다. 어둡고 무거운, 붉은 기를 띤 청색-그것은 이브 클라인의 블루나 앙드레아스 세라노의 핏빛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그 끌려들어가 버릴 듯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폐허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장엄한 리퀴엠이 들려온다. 정체를 모를 회한과 함께 감미로운 고통이 심장을 조여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주어지는 시각적 정보의 양에 따라서 사고하도록 끊임없이 길들여져 왔다. 다시 말하면, 사진의 표면에 제시되는 시각적 정보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간의 사고의 영역은 좁혀지는 것이다. 그의 사진에서는 모든 살아 있는 움직임-인간의 형체마저도 장시간 노출로 인해서 환영처럼 사라져 버리고, 극히 빈약한 양의 정보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닌 상상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그려왔던 이미지를 형상화시킬 현실대상을 찾아서 그는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맨다. 벤치는 그의 눈길에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비록 프레임에 돌발적으로 뛰어들지도 모르는 우연의 요소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대부분 사진가의 의지에 의존되는 필연의 결과물이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이국에서 사진을 찍어 왔다. 설령 외국이 아닐지라도 유원지나 공원 같은 외래적인 장소다. 그의 풍경은 적어도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무대를 외국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낯선 곳에서 촉발되는 길들여지지 않은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그는 외국의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갖고 있는 ‘아우라’를 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의 사진에는 ‘풍경’이라고 하는 단어가 갖고 있는 서정성이 전면에 나와 있다. 광활한 토지, 그것도 낯선 외국이다.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안쪽을 들여다 볼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혹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의 사진에는 그래서 그곳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대기가 화면 전체에 중저음으로 깔려 있다.

아무리 많은 사진이 눈앞에 놓여 있어도 나는 그 가운데에서 박홍천의 사진을 골라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앞으로 그의 사진 스타일에 과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최근 10여 년 간의 작업을 통해서 그가 이미 색채와 시간이라고 하는, 사진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얼마쯤 확실한 해답을 얻어냈고, 자신의 방법론을 더욱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 박홍천, 서울: 샘터 아트북, 1997

사진비평가인 김승곤은 순천 국립대학교 석좌교수이며 사진비평상의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